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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떠나 숲으로 간 사람의 20년 연구
시장을 떠나 숲으로 간 사람의 20년 연구
  • 방민호(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18.0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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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범순 편, 『이상 시 전집 : 꽃 속에 꽃을 피우다』

 

 

 

 

 

 

지난 12월 9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한 지하 공간에서 조촐한 출간 기념회가 열렸다. 서울대 신범순 교수가 엮은 새로운 이상 시 전집, 『꽃 속에 꽃을 피우다』의 출판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필자는 신범순 교수의 연구실 바로 옆에 연구실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또 지난 13년 동안 늘 그가 끓여 주는 커피를 얻어 마신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그의 변함없는 연구 태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참석했다. 외빈들은 많지 않았다. 현대문학 연구 분야에서 먼 걸음하신 분으로는, 고려대에 오랫동안 재직하셨고 지금은 동인문학상 심사 위원이신 김인환 선생,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를 번역하신 나병철 선생 등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부족하지 않았다. 김인환 선생께서 저술계 아닌 ‘축사계’에는 처음 나서 보신다는 소감과 더불어 덕담을 해주셨고, 필자도 몇 마디 했고, 나 선생께서도 몇 말씀 하셨다. 끝에는 저자의 소감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는 꽃다발 증정 등. 그것으로 끝인 단출한 행사였 다. 그래도 좋은 자리였다. 
이 새로운 이상 시선집 『꽃 속에 꽃을 피우다』는 주목을 받아 마땅한 이유들이 있다.

우선, 책을 낸 출판사 대표 형난옥 선생. 현암사 재직 시절부터 만나 본 이분은 갈수록 찾아보기 힘든, 고전적 전문 편집자이자 기획자다. 이번 책도 그 난해한 이상 시들을 영인본에 원문 주해본을 겸하여 세심하게 공들여 하나의 작품이라 불러 손색없이 주조해 냈고, 그 정성이며 솜씨 가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저자인 신범순 교수의 집념. 이 역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그 동안 이상 전집이나 선집은 여러 번 나왔다.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각 장르별로 나누어 김윤식 선생을 비롯한 편자들이 함께 펴 낸 문학사상사 판, 한 사람의 노력이 얼마나 값진 성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알게 해준 김주현 편 소명사 판, 각 작품들의 장르별 유형화를 새롭게 꾀하고 원문과 현대역을 나란히 배치한 권영민 편 뿔출판사판(나중에 태학사로 갔다) 등에 임종국 선생과 이어령 선생이 각각 펴낸 옛 날 것들도 있다. 이 모든 전집, 선집이 다 가치 있으되 또 한 번 시 전집을 내야 할 필요 가 있었던가? 있었다. 이번 시 전집은 두 가지 중요한 특질을 지닌다. 그 하나는 이 전집만큼 일관된 시각과 독해 방향을 갖추어 밀어 부쳐 쓴 전집은 없었다 고 할 수 있다.
신범순 교수는 들뢰즈와 니체 철학에 오랫동안 심취했을 뿐 아니라 이에 한국의 상고사와 고전적 미학 전통을 접맥시켜 독특한 미학 사상을 구축한 담론가다. 그는 작가나 작품을 개별적으로 다루기 위해 쓰지 않고 그들, 그것들을 관통하는 원리와 바탕을 밝혀내거나 입증하기 위해 쓴다. 그의 저작들, 예컨대 『노래의 상상계』(2012)는 단순한 현대시 연구가 아니라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시의 흐름에 대한 깊은 안목의 발현물이다. 그는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 나비』(2007), 『이상 문학 연구』(2013) 등 이미 써 낸 저작물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번에는 이상 시 전체에 대한 주석 작업을 시도했던 바, 이상 시가 이렇게 새롭게, 자세하게 주석된 일은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듯 찬사 비슷한 언사만 늘어놓고 나면 실속 없는 말잔치로 끝나게 될 것이다. 필자가 신범순 교수의 옆방으로 처음 왔을 때부터 들어온 이야기 하나가 있다. 그것은 이상 문학은 일종의 ‘니체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소설 전공인 필자에게 시 전공인 그는 이상 소설의 뿌리가 시에 있으며 시에 나타난 이상의 독창적 사상을 이해해야 그 
의 문학의 전모를 밝혀 낼 수 있다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그는 자신이 밝혀 낸, 이상에 있어서의 니체를 증명해 내려고 사력을 다 했다. 그런 데, 과연 정말 그러한가? 숱한 사례들을 꼽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2부 첫 부분이 ‘거울을 가진 아이’라는 사실만을 상기해본다. 이상이 간단한 천재가 아니었음은 그의 대표작 「날개」에 나타난 다음 구절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내가 잠을 깨었을 때는 날이 환히 밝은 뒤다. 나는 거기서 일주야를 잔 것이다. 풍경이 그냥 노오랗게 보인다. 그 속에서도 나는 번개처럼 아 스피린과 아달린이 생각났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마르크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아내는 한 달 동안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이고 내게 먹였다.

 

작품 전반부에 백치적 존재로 나타나는 「날개」의 주인공은 여기에 이르러서도 아직 정신은 혼미 속에서 깨어나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독백 속에 나타나는 ‘마르크스, 말사스, 마도로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이 백치 주인공이 사실은 문자 그대로의 백치는 아님을,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와 맬서스의 시대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 맬서스란 다윈이 자신의 진화 이론을 수립하는데 깊이 참조한 논자였다. 이상은 이러한 지적 맥락을, 마르크스와 다윈과 맬서스의 담론적 관계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 끝에 이상의 니체가 있었으니, 그는 어떤 니체를 생각했던 것일까.

니체는 읽어 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철학자다. 그에 관해서 얼마나 읽었던가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자신이 없어진다. 마르크스라면 그렇지 않을 것을, 니체라면 모든 것이 쉽지 않은 영역에 들어서는 것 같다. 아마도 그가 확실히 철학적 사유를 전개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철학자가 아닌 것이 아님에도 끝내 철학을 폐지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과 달리 니체는 철학자로 남은 사람임에 틀림 없다. 마르크스가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주목하여 사회와 역사로 나아간 반면 그는 삶 자체, 삶과 죽음, 인간과 신의 관계를 ‘시종’ 탐 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출생 연도상 25년 이상 거리가 있음에도 두 사람 사이의 시대적 거리는 결코 멀어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이 지적 세계에 놀랄 만한 충격을 선사한 시대의 또 다른 거인들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1867년에 출간되었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1883년에 나왔다. 이 저작들이 현대인들의 사 고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종의 기원』은 인간이 신의 창조물이 아니요, 진화의 산물이라 함으로써 신본주의적 세계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마르크스는 인간의 문화적 삶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노동에 근거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사회라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본격적 탐구의 길을 열었다. 그렇다면 니체는 무엇을 한 것일까? 
니체는 인간들로 하여금 죽음이 있음을 아는 자로서 살도록 하고자 했다.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자’라는 말은 저 비극 『안티고네』에 나오는 말이었던가. 그것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에서 똑같이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어와 문학에 정통한 힘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이, 문화와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탐구하고자 했고, 그로부터 『비극의 탄생』(1872)을 시발점으로 한 초인적 탐 구의 길이 열리게 된다. 
이상은 폐결핵에 시달렸고 끝내 28세로 이르게 세상을 떠난 시인이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 했지만 두려움에만 머물지 않았고, 지상의 삶을 사랑하여 모든 정치적 억압에서 자유롭고자 했다. 죽음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는 이상의 것이자 동시에 니체의 것이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장 감명 깊은 장의 하나는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였다. 신범순 교수의 이번 책 『꽃 속에 꽃을 피우다』는 이상을 통하여 니체를, 나아가 니체를 통하여 이 지상적 삶의 근본 문 제를, 고뇌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고자 한다. 이 책을 한 번 펼쳐 볼 것을 권한다. 이 새로운 전집 안에 우리가 몰랐던 이상이 산다.

 

 

 

『이상 시 전집 : 꽃 속에 꽃을 피우다(1, 2권)』

나녹 | 신범순 엮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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