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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숨결을 따라 걷다
작가의 숨결을 따라 걷다
  • 최유정
  • 승인 201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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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기행』 저자 방민호 인터뷰
자료제공 아르테
자료제공 아르테

[10월호] 서울. 단어 하나에 담긴 감정, 이야기, 빛깔, 추억이 이다지도 많을 수 있을까. 적어도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 번도 그 땅에 발을 붙여보지 않은 누군가에게라도 ‘서울’이 주는 힘은 뭉근하다. 그래서 어쩌면 서울에서 태어난 수많은 문학작품의 운명은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을 빚은 작가들의 발걸음을 따르는 책, 『서울문학기행』의 탄생 역시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이상, 이광수, 박태원, 임화, 박인환, 김수영, 손창섭, 이호철, 박완서 그리고 탄생 100주년이라는 우리들의 ‘동주’가 걸었던 서울이 책에 담겼다. 저자를 만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방민호 교수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 윤동주 글(1941년 2월 7일)

 

 

#1. 문학이 숨 쉬는 무대 - 첫 번째

당대 거의 모든 작가들이 모여들어 문학 활동을 한 곳이었고, 작품의 무대와 작가인 그들 생애의 무대였기에 교수는 ‘한국문학의 중심’ 서울을 문학기행 행선지로 삼았 다. 국문학, 현대소설을 연구하다 보니 서울의 지리地理는 보다 의미 있게 다가왔다. 작품을 읽을 때 항상 작가 생애, 생각과 관련지어 읽기 좋아하는 취향 때문이었다. 작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논문은 물론 글을 쓸 수 있다는 교수라, 그 마 음속에 담아놓은 작가와 시인들을 선정했다. 서울과 인연이 깊고 그러면서도 의미 와 가치가 높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서울문학기행』이 쓰였다.

충청도가 고향인 교수가 대학 원서를 내기 위해 처음 찾았던 1984년 겨울의 서울 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그해, 이듬해 겨울에 연달아 많은 눈이 내렸는데 눈이 채 녹 지도 않은 거리를 버스가 내달려 진흙탕이 됐다. 그리고 시기는,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기였다. 시대와 현실에 눈 뜨게 되며 30년 이상을 살아오게 된 지금의 서울은 이제 회색빛이 아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대전보다 더 많은 생이 담겨있는 이곳에 애착과 함께 색채가 생겼다. 여기에 우리 역사 순환과 고통, 기쁨 까지 전부 녹아들어 이제 말할 수 없이 귀한 도시가 됐다. 그래서, 나누고 싶었다.

 

#2. 완성체였던 윤동주의 순수

아무래도 남다르다. 왜인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가슴이 저릿해지곤 한다. 윤동주. 삶의 청명에 스러진 이가 한 둘이겠냐만은, 그가 남긴 시와 이름은 어쩐지 콕 박힌다. <무서운 시간>을 쓰고 꼬박 4년이 흐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아직까지도 명쾌하게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죽음을 맞았다. 서울 청운동 윤동주문학관에서 교수를 만난 이유는 그가 비단 『서울문학기행』의 저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교수에게 동주에 대해 듣고 싶었다.

책에 담겨 있는 윤동주의 이야기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머물렀던 서울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서 시작된다. 시인이 산책을 했던 인왕산 수성동계곡, 학교에 갔다가 전차로 이동해 순방했던 충무로 인근 책방들, 음악을 즐기며 새로 산 책을 들춰보던 음악다방. 교수는 청년 동주의 일상을 당시 함께 하숙하던 정병욱의 회고담을 인용해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려놓았다. 그런데 교수가 주목한 당시 동주의 ‘인물’은 정병욱이 아니라 김송(김금송), 누상동 하숙집의 주인이자 소설가였다. 1909년에 태어나 3.1운동 이후 사회운동이 활발하던 192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김송은 1930년대 전후 문단이 화려하고 문제작들로 가득하던 시기에 윤동주를 만났다. 민족적 자각이 불길처럼 일어나고, 좌파문학부터 모더니즘 문학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활동하며 문학 연구를 이어가던 작가들이 많던 시기였다. 일제 요시찰 인물로 감시될 정도의 문제작을 쓰고, 잡지 발행까지 하던 김송의 집은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연결돼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교수는 김송이라는 인물 자체가 윤동주에게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기 보다는 윤동주가 그런 집에서 하숙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단 감각을 익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평양 숭실중학 시절부터 정지용의 시를 읽었던 윤동주의 시 정신이 보다 성숙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며 홀로 조용히 시를 썼던 윤동주가, 그때 이미 프로 시인이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독하게 시를 써 내려간 정진의 과정이, 의식은 이미 전문적인 시인의 그것으로 꽉 차 있었음에도 그것을 버린 채 시를 썼다는 의미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수는 윤동주 시의 순수를 윤동주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타락할 기회가 없어서 순수했다는 의미에서의 순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젊어서 죽은 사람은 다 순수한가요” 윤동주에게 순수란 그가 지향한 마음의 경지였던 것이다. 하나의 예로 이상도 윤동주만큼이나 요절한 청년 시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상을 이야기할 땐 순수보다는 퇴폐미를 떠올린다. <날개>, <종생기>, <실화>, <동해>, <지주회시>가운데 점 이런 작품 모두 순수보다는 퇴폐미로 가득하다. 이상이 <종생기>를 썼던 나이가 27세였는데 스스로를 ‘노옹’이라고 표현했다. 윤동주는 ‘별’이라는 시어로 순수를 지향하지 않았는가. 그의 순수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그 결과 자신이 지향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수는 윤동주의 시를 읽자면 몸서리가 쳐질 때가 있다. 성찰을 거듭해 시에 투영된 그의 무의식이 느껴져서다. <무서운 시간>을 읽어 보면 윤동주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느낀다. 마치 그 소리를 듣는 것 같이, 교수는 그것이 문학 속에 침잠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바라보려고 하는 심안이, 윤동주에게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한다.

이러한 무의식과 성찰에 대한 생각에 다다른 이유가 있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이 쓴 무의식에 관한 글 중에 열두 살짜리 어린 소녀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소녀가 꾼 꿈을 소재로 그린 그림을 아버지에게 선물했는데 아버지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소녀에게 보여줬거나 경험하게 하지 않았던 기괴한 형상이 담긴 그림에 딸이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기에 이른다. 소녀의 아버지는 그 그림을 가지고 융을 찾았고, 융은 후일 비록 소녀가 10대 초반 어린 나이일지라도 가깝게 예견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이라고 판단했다. 의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자기 세계를 인식하는 무의식에 관한 이야기다. 교수는, 융이 보았던 소녀의 그림처럼 윤동주 또한 죽음에 가까워진 자신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음 속 눈동자랄까. 결국 윤동주의 순수 정신이란 일제에 의해 핍박받는 시대와 현실에서의 자신이 아닌 스스로를 성찰하고 들여다보는 시의 세계 안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료제공 아르테
자료제공 아르테

#3. 우리에게, 동주

영화 <동주>를 통해 청년시인 윤동주의 독립운동 활동에 관한 기록이 조금 더 많이 알려진 모양새다. 남겨진 시인의 사진을 보면 그는 시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분명 단단함이 느껴지는 강골이다. 분명 그 안에 우리가 느끼고 있는 시의 세계가 숨어 있으리라. 송우혜 작가가 쓴 『윤동주 평전』으로 알 수 있는 그의 모습 역시 유약한 소년보다는 강인한 조선인 청년이다. 교토에서 사촌 송몽규와 함께 학교에 다닐 때 윤동주는 그곳에서 금지된 조선어로 마음껏 말하고, 거리낌 없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내면에만 감춘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녔던 윤동주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가 가진 저항정신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고 교수는 말한다. 재판에 회부됐을 때 알려진 죄목에 역시 윤동주가 조선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조선 문화를 지키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런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했던 일은 당시 시대상을 잘 파악해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다. (보다 정밀한 검토가 필요한 일이지만)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령이란 단순한 성씨姓氏 변경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부계혈통 중심 문화에 따라 여성이 시집을 가도 성이 바뀌지 않는 우리나라 전통과 달리 가문 중심인 일본식 가족문화를 우리나라에 이식하기 위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실제 일본 성씨로 바꾸지 않았다고 해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정상으로는 우리 전통 성씨를 그대로 사용함에도 그 성씨는 ‘일본식 성’으로 모두 편입된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동주가 유학을 앞두고 일본식 성씨로 아예 개명을 해야 했던 이유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조선식 성씨까지도 허용하지 않았던 강압 때문이었다.

독립운동가로 세상을 떠나야 했던 윤동주 외에도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당시 지식인들은 많다. 그들의 추후 행적에 대해서야 말할 것이 없지만 단순히 유학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친일을 논하기엔 어렵다. 일제강점기의 우리 문학인들은 대개 일제를 ‘2류’ 제국주의 국가로 자각하고 있었다. 수백 년에 이르는 식민지시기를 보낸 해외 여러 나라들과 비

교하면 우리가 겪은 식민지시기는 짧다고 볼 수도 있다. 교수는 ‘제국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들의 문학까지 했던 대개 식민국가들과 달리 우리는 분명 “끝까지 한국어를 지켰다”고 말한다. 2류 제국주의 국가로 인식했던 일본으로 유학을 간 문학인들의 이유는 일제를 보다 근대화된 문화를 배우기 위한 매개체 역할,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예를 들어보자. 『외투』의 작가 고골은 우크라이나 출생임에도 거의 모든 작품을 러시아어로 남겼다. 자기 민족 언어로 남긴 작품은 소수의 민담 정도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말했을 만큼. 그런데 우리는 일본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많은 작가들이 그러했다. 현대소설을 연구하는 교수는 ‘한국문학의 정의’가 너무 낡은 개념을 답습하고 있음을 아쉬워했다. 도남 조윤제 선생이 ‘조선인이 조선어로, 조선인의 사상과 감정을 그린 것’이라고 정의한 것을 조윤현 선생이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생활과 감정을 그린 것’이라고 이었다. 외국인 작가라 할지라도, 그의 작품이 한국어로 쓰였다면 바로 그 ‘한국어’가 중요하다.

일제강점기 말기는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했던 이유로 진정 암흑기였다는 말을 종종 한다. 하지만 교수는 ‘중세 암흑기’에서 비유적으로 쓴 그 단어를 지양하고 싶어 한다. 당시에도 우리의 많은 문학인들은 끊임없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서로에게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표시했다. 우리는 우리말을 끝까지 지키면서 우리의 시를 쓰고, 정신을 지켰다. 비록 육신은 떠났지만 정신은 시나 글의 형태로 해방 이후 시대에 넘겨준 시인들이 있다. 대표적인 이가 윤동주와 이육사다. 물론 다행히 살아서 넘어와 그때 지켰던 시들을 쓴 시인들도 있다. <청록집>을 남긴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다. <석초시집>을 쓴 신석초도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 고통스런 상황에 타협하지 않고 썼던 시를 모아 <나 사는 곳>을 남긴 오장환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윤동주의 시는 정말 소중하다. 육신은 감옥에서 죽었지만 정신을 시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줬다. 해방 이전과 이후를 윤동주, 이육사 같은 이들로 정신의 연속성을 주장할 수 있다. 과거를 청산하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정신을 지켜 해방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귀하게 봐야 한다. 윤동주, 그는 한국어를 지켰다.

 

#4. 문학이 숨 쉬는 무대 - 두 번째 그리고

교수는 서울에 이어 목포에서 부산까지 남도 문학기행을 하고픈 계획이 있다. 올해 여름 배낭을 메고 남쪽 해안선을 따라 떠나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목포에 김지하, 해남엔 황지우. 아! 김남주도 있다. 보성엔 태백산맥도 있는데, 하동으로 가면 이병주, 통영엔 박경리. 서울에서 찾은 이들은 근대시기 활동 작가가 더 많았다면 남도에는 현대작가와 시인에 무게를 두고 싶은 구체적인 계획도 머릿속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우선 그보다 조금 더 ‘끌리는’ 행선지가 생겼다. 갈 수 없는, 북한 동해안선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우리 작가들의 숨결은 강원도에서 시작해 함경도까지 분명히 서려있다. 금강산을 거쳐 원산, 함흥으로 곧장 올라가 지금은 김책시로 불린다는 성진, 거기에서 더 올라가면 청진이 있단다. 백석의 시 <함주시초>를 떠올릴 수 있는 함흥 옆 함주. 그가 함흥영생고보 교사를 할 때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해>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효석이 경성농업학교 교사를 하며 원두커피를 마시고, 러시아인들이 외인촌을 이루고 살던 곳을 기억하는 경성까지. 그곳에도 분명 그들이 생각했던 문학과 예술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러한 근대 작가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그려냈을지 학자로서 교수는 궁금하다. 그래서 갈 수 없는 그곳에 관한 옛 기록들과 사진을 가지고 마음만큼은 기행을 갔다는 생각으로, 교수는 꼼지락꼼지락 펜을 만져보고 있다.

 

『서울문학기행』

방민호 지음 | 아르테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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